"그러나 "모든 텍스트는 인용 표시 없는 인용이다" 혹은 "모든 문학은 표절이다"라는 주장에 담긴 의미는 텍스트의 발생학적 기원을 실증적으로나 철학적으로 규명하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텍스트와 관련하여 인용을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순수한 창작'이라는 신화가 지니고 있는 허구성을 비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모든 쓰기-읽기 행위가 처해 있는 유한성을 인정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유한성을 어떤 대화를 가능케 하는 정치적 조건으로 삼기 위해서라고, 나는 이해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텍스트는 실체가 아니라, 쓰기와 읽기라는 행위가 동시에 참여하는 어떤 활동의 장을 가리키며, 인용은 그 활동의 역사성을 증언하는 개념일 수 있다. 텍스트에 있어서의 역사성이라는 지평은 크라카우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의 세계와 대책 없는 주관주의적 심리주의 사이의 영역, 즉 '중간계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 중간의 영역은 역사의 영역이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것을 바르트는 더할 나위 없이 간명하게 표현하다. "텍스트를 쓰는 나는 종이 위에 씌어진 나일 뿐이다." 텍스트 바깥의 나, '의도의 심연'을 간직하고 있는 초월적 나라는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비역사적이고, 더 나아가 비정치적이다. 이것을 사실 명제이자 선언이면서, 동시에 텍스트 바깥을 도피처로 삼으려는 모든 보수주의적 태도에 대한 정치적 비판으로 읽을 수는 없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바르트의 테제는 다음과 같이 변주되어 인용될 수 있늘 것이다. "텍스트를 인용하는 나는 텍스트로 인용되는 나일 뿐이다." 이른바 '인용으로서의 텍스트'는 읽기-쓰기, 쓰기-읽기의 구분 불가능성과 동시성을 증언하고, 그 사이를 적극적으로 매개하는 실천적 개념에 가깝다."
"반면 브르통으로부터 '신경쇠약자', '똥-철학자excrement-philoshopher'라고 경멸당했던 바타유는 일찍부터 초현실주의가 지니고 있는 한계를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브르통을 따르는 초현실주의자들은 '치기 어린 희생자'의 포즈를 벗지 못한, 일종의 소영웅주의적 엘리트주의자들에 불과했다. 바타유가 피력한 여러 감정적인 비난들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들의 제스처가 주류 상징 질서로부터 승인받기 위한 '오이디푸스적 분탕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자신들이 그토록 부정하던 자본주의의 오이디푸스적 승화에 유혹되기 쉽다는 지적이었다. 바타유의 저주에 가까운 비판은 오래 지나지 않아 사실로 드러났는데, 초현실주의의 실패는 그들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 보드리야르에 의해 극적으로 선언되기에 이른다. "'현실이 허구보다 낯설다'라는 초현실주의자들의 경우, 삶의 미학화에 대한 경구는 이미 유효하지 않다. 더 이상 삶이 마주할 수 있는 허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은 이미 현실의 유희, 급진적 탈마법화에 의해 끝나 버렸다."(<<상징적 교환과 죽음>>) 브르통의 말대로 진정한 삶은 다른 곳에 있다. 그러나, 다른 곳은 없다."
"벤야민에게 인용이 중단이라면, 상황주의자들에게 인용은 상황의 전면적인 재구축이다. 이들은 "이념은 표절 속에서 진보한다"라는 로트레아몽의 말을 전면에 내세우고, 전용detournement이라는 전략적 개념을 적극적으로 제시한다. 이른바 이념의 전용을 통해 역사적으로 오염된 이념을 새롭고도 정확한 이념으로 수리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된 아이디어이다. 때문에 이들에게 오해와 오독은 필수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아니, "상황주의는 '오해의 정당성legitimacy of misinterpretation'을 구축한다"는 무스타파 카야티의 말처럼 인용에 동반되는 오해와 오독이야말로 새로운 혁명적 상황을 구축하기 위한 적극적인 기술의 일환이다. "상황의 구축은 연극에 대한 이념의 근대적 몰락의 반대편에서 시작한다. 연극의 주요 원리(비개입)가 어떻게 낡은 세계에서의 소외와 관련 있는지를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반대로, 가장 혁명적인 문화적 실험들은 배우에 대한 관객들의 심리학적 동일시를 끊어버리고, 관객들로 하여금 그 자신의 삶을 혁명적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고취시킴으로써 상황에 참여시킨다. (......) 그렇게 더이상 평범한 배우로 불릴 수 없는 새로운 의미의 배우들, 진정으로 살아 있는 인간들livers이 늘어날 것이다."(기 드보르. <상황의 구축에 관한 보고서>)"(강동호, <인용-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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